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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택시운전사로 보는 민주화 운동의 역사

youngstory01 2025. 2. 12. 0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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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택시운전사

독일 기자를 택시에 태우다

1980년 5월, 택시운전사 김만섭(송강호) 은 서울에서 혼자 딸을 키우며 살고 있습니다. 그는 하루하루 손님을 태우며 작은 돈벌이로 살고 있었는데 점심을 먹으러 갔다가 외국인 손님을 태우고 광주까지 가면 10만 원을 벌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밀린 월세도 내야 하고 생활비도 부족했던 김만섭은 깊이 생각하지 않고 무작정 손님을 태우러 갔습니다. 그가 태운 손님은 독일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토마스 크레취만)였습니다. 한국말도 서툴고 어딘가 심각해 보이는 독일기자는 꼭 광주로 가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김만섭은 그가 왜 광주에 가려 하는지 몰랐지만 큰돈을 벌 수 있다는 생각에 서둘러 광주로 떠났습니다. 하지만 광주로 가는 길은 쉽지 않았습니다. 곳곳에 군인들이 검문소를 세워 감시하고 있었꼬 외부인들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었습니다. 김만섭은 관주 사람인 것처럼 사투리를 써 검문을 빠져나가 광주에 도착했습니다. 검문소가 있어 이상하다 생각했는데 광주는 생각보다 평온했습니다. 사람들은 길을 걸어 다니고 가게도 문을 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충격적인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거리에는 민주화를 외치는 학생들과 시민들이 가득했고 뒤이어 군인들이 달려와 이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하기 시작했습니다. 곤봉과 총으로 시민들을 폭력적으로 탄압하는 모습이었습니다. 김만섭은 깜짝 놀랐고 힌츠페터는 알고 있었다는 듯이 카메라를 꺼내 사진을 찍고 영상을 촬영하기 시작했습니다. 알고 보니 힌츠페터는 광주의 참혹한 현실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광주로 온 것이었습니다.

세상에 알리다

김만섭은 점점 불안해졌습니다.. 이곳은 너무 위험해 보였고, 딸아이를 위해 무사히 서울로 돌아가야 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광주에서 만난 택시기사 황기사(유해진)와 대학생 구재식(류준열)을 통해 광주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하나둘 알게 되면서 힌츠페터와 함께하기로 마음을 바꿨습니다. 광주 시민들은 김만섭과 힌츠페터를 숨겨주고 도와주었지만 군인들은 점점 더 심하게 통제하기 시작했습니다. 더 이상 광주에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 김만섭과 힌츠페터는 광주를 탈출하기로합니다. 황기사와 다른 택시기사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길을 열어주었고 김만섭은 우여곡절 끝에 검문소를 빠져나가 서울로 돌아갔습니다. 서울에 도착하자 힌츠페터는 자신이 직접 찍은 영상을 반드시 세상에 알리겠다 다짐하며 김만섭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며 이름을 알려달라고 하지만 김만섭은 끝까지 자신의 이름을 알려주지 않고 사라졌습니다.

시간이 지나 힌츠페터는 다시 한국을 찾아 김만섭을 찾으려 했지만 그를 찾을 수 없어 만나지 못했습니다. 영화는 힌츠페터가 김만섭을 그리워하며 그의 흔적을 찾는 장면과 함께 끝이 납니다. 실제로 김만섭은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에 생존하였다고 합니다. 그의 자세한 정보는 나와있지 않지만 광주 민주화 운동이 보도됨과 동시에 국제 사회에서 주목받은 인물이었습니다. 평범한 삶을 희망했던 것 같지만 민주화 운동 이후 그의 용기와 희생이 값지다 생각하고 영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민주화 운동의 역사

이 영화는 광주 민주화 운동을 토대로 만들었습니다. 1980년대는 군사 정권이 주를 이루던 강압적인 시대였습니다. 독재정권이 무너지고 봄이 오는 줄 알았지만 전두환 주도 신군부 세력이 정부를 점령해 다시 한번 독재 시대 국부정권을 맞이해야만 했습니다. 이런 정부의 억압 속에 광주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5월 18일 전남대 학생들은 하나 둘 모여 노래와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공수부대원들은 학생들을 폭력적으로 진압하기 시작했고 무기 하나 없는 학생들을 진압봉으로 가차 없이 휘두르며 머리를 때렸습니다. 5.18 민주화 운동의 시작이었습니다. 이후 공수부대는 전남도청 방향으로 전진하며 시위를 강압적으로 진압하기 시작했고 시위를 하지 않은 사람들도 눈앞에 나타나면 남녀노소 불문하고 마구 폭행했습니다. 쓰러진 사람들은 질질 끌고  트럭에 실었습니다. 며칠 동안 진압이 계속되었고 정부는 광주사태라 말하며 불순분자 및 간첩들의 선동이라 선포하고 공수부대에게 발포 명령을 내렸습니다. 광주 민주화 운동은 학생과 시민들이 중심이었고 당시의 모습은 입에 담을 수 없을 만큼 잔혹했으며 정확한 사망자 수를 확인할 수 없지만 추정하기로는 수백 명에서 수천 명에 이른다고 알려졌습니다. 군사정부의 잔인한 무력 진압으로 많은 시민과 학생들이 희생되었고 그러한 억압 속에서도 생존과 자유를 위해 투항하는 모습은 현재까지도 대한민국 역사의 중요한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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